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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문 발간 - 서기1605년

로운스토리 2020. 2. 28. 23:37

신문의 기원은 십자군 전쟁 당시 상인들이 고용한 정보통들의 편지를 서로 돌려봤던 것에서 출발한다.

고대로마의 정책 공고문인 Acta Diurna를 시초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후 중세가 끝나고 부르주아가 등장하고, 영국에서는 젠트리계층이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며 특정 정파가 자신들 입장을 강변하기 위해 발행하는 정파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관가 소식을 전달하는 매체가 등장했다가 자연스럽게 논평이 덧붙으며 정파지로 발전했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는 정파지의 난립으로 인한 카오스가 열리기도 한다.

신문이 현관 앞에 배달되기 훨씬 이전인 로마 시대에는 대중을 위해 거리에 뉴스가 게시됐다.

중국에서는 문관(文官. civil servant)들이 궁중업무 기록물을 대중을 위해 읽어주었 있었다.

15세기 초 유럽인들은 유력한 무역업 자들 사이에 오가는 뉴스 팸플릿이나 소식지를 통해 정보를 입수했다.

이러한 상업 출판물들이 17세기 초 최초의 신문으로 발전했다. 북해연안의 오늘날 벨기에 지역에서 1605년에 발간된 <니웨 타이딩헨 (Niewe Tjdingen), 1609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발간된 <릴레이션 Relation)〉, 같은 해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발간된 <아 비사 렐라치온 오더 차이퉁(Avisa Relation〉 등이 선구자적 신문들이다. 이 시기에는 모든 신문이 정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이는 유럽에서의 신문 발전

에 장해가 됐다. 영국 최초의 신문인 <데일리 쿠란트(Daily Courant)〉는 1720년에 처음으로 발간됐다.

세계 최초의 신문…1577년 조선시대 '조보' 실물 발견

세계 최초의 신문으로 알려진 1577년 조선시대 '조보'의 실물이 처음 발견됐습니다. 지금까지는 실물이 없었기 때문에 1660년 독일의 일간지가 최초의 신문으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10년인 1577년 음력 11월 28일, 우연히 조보를 발견한 선조가 대신들 앞에서 크게 분노합니다. 선조는 발행 석 달 만에 조보를 폐간시키고 조보 발행인 30여 명에게 가혹한 형벌과 유배를 내린 왕 선조. 여기까지가 조선왕조실록으로 확인된 민간 조보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그 조보가 영천의 한 사찰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지봉 스님/경북 영천 용화사 : 조그만 서지 관련 경매 사이트에 올라왔었어요. 별로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안 가지고 있는 속에서 귀중한 자료라는 직감을 가지고 (입수하게 됐습니다.)]

1577년 인쇄물로 확인된다면 세계 최초의 상업 일간지이자 활자 신문이 되는 겁니다. 1660년 발행된 세계 최초의 일간 신문인 독일의 라이프찌거 짜이퉁보다 80여 년 앞섭니다. 학계 교수와 서지학자 등 전문가들은 민간조보의 연대 측정 등을 통해 조보 검증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조보(朝報) : 승정원에서 정부의 공보매체 내지 관보로서 발행한 신문

기별·기별지(奇別紙)·조지(朝紙)·저보(邸報)·저장(邸狀)·저지(邸紙)·난보(爛報)·한경보(漢京報) 등으로도 불렸다.

조보기란 조정의 소식 또는 조정에서 내는 신문이라는 뜻이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기별 또는 기별지로 통하였는데,

기별은 곧 소식이라는 뜻으로 조보가 소식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조보의 기원에 대해서 차상찬(車相瓚)은 『조광(朝光)』(1936.11.)에 쓴 「조선신문발달사」에서 신라시대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알려진 조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종실록』

제38권의 중종 15년(1520) 3월 26일자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이 조보는 중종 이후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행되어 왔으며,

1895년 2월 『관보(官報)』로 바뀌면서 없어졌다.

[출처 : 내셔날지오그래픽 /나무위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SBS 뉴스